극지탐험가
- 섀클튼
- 모슨
- 스코트
- 스웨덴탐험대
- 시라세
- 아문센
남극이 1819년에 발견된 이후, 크고 작은 탐험들이 수백 번에 걸쳐 있었다. 요즘은 과학이 발달했고 그간의 자료와 경험이 모여 준비만 잘 하면 남극이 크게 위험하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른 바 ‘영웅들의 시대’ 와 그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남극지도는 물론 남빙양 해도도 없었고, 경험도 없었고. 나무로 만든 배가 전부였고 무전기도 없었다. 조건이 그렇게 나쁘고 어려웠어도 탐험대원들의 용기와 사명감은 대단했다. 그러므로 19세기 말에는 남극대륙에 상륙했고, 1911년 12월에는 남극점에 사람이 갔을 정도였다.
남극을 탐험했던 수많은 사람 가운데 누가 가장 위대한 탐험가일까? 남극을 아는 사람들은 수많은 탐험가 가운데 가장 위대한 탐험가로 ‘어네스트 섀클튼’ (1874-1922)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왜 그는 가장 위대한 남극탐험가로 인정받는가?
섀클튼은 아일랜드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퀘이커교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1874년 2월 15일 8여 2남 가운데 첫째 아들이자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가 10살이었을 때, 가족이 런던으로 이사를 갔으며 17살부터 선원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9년 후에는 3등 항해사가 되어 남아프리카까지 항해했다. 그 때 친구의 아버지가 스콧이 조직한 남극탐험대에 큰 돈을 기부하면서, 섀클튼은 그 연유로 1901-03년에 걸친 스콧의 1차 남극탐험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는 민간인이었지만 스콧의 인정을 받아, 스콧은 그와 에드워드 윌슨과 함께 남극점정복에 나섰고 당시로는 가장남쪽인 남위 82° 17’에서 돌아섰다. 그는 이 탐험에서 괴혈병으로 크게 앓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귀국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자신이 탐험대를 조직해 1907-09년에 걸쳐 탐험에 나섰다. 그는 동료 세 사람과 함께 남극점정복에 나서 1909년 1월 9일 남극점에서 180km 떨어진 남위 88° 23′ , 동경 162° 까지 가, 그 전의 기록을 깨뜨렸다. 이 탐험대의 다글라스 모슨을 포함한 세 사람은 사상 처음으로 자남극점에 도착하여 탐험대의 보람을 높였다. 영국으로 돌아온 섀클튼은 국민의 영웅이 되었고 11월에는 경(卿)의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1914년 세 번째 탐험에 나섰다. 그 때는 이미 남극점이 정복된 후라, 그는 1914-17년에 걸쳐 남극대륙을 종단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웨델해 쪽에서 남극점을 지나 남극고원에서 로스빙붕으로 내려가는 비어드모어 빙하까지는 자신들이 가지고 간 물품들을 쓰고 그 다음에는 다른 대원들이 로스해 쪽에서 준비한 식량과 연료를 쓸 계획을 세웠다.
그가 탄 배는 1914년 12월 5일 남 조지아섬을 떠나 남쪽으로 항해했다. 그러나 바다에 얼음조각이 많아 탐험선 엔듀어런스호는 곧 얼음에 둘러싸였고 가다가 얼음에 막혀 서기를 되풀이했다. 마침내 다음해 1월 19일 남위 76°34분’, 서경 31°30’에서 서남극 코츠랜드 앞에서 얼음 속에 완전히 갇혔다. 사람의 힘으로는 배를 꼼짝달싹 할 수 없었고 얼음이 가는 대로 따라가는 운명이 되었다.
사람들은 얼음 위에서 개를 훈련시키거나 축구나 하키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5월 1일에는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내려갔고 남극의 밤이 시작되었다. 눈보라가 심했고 얼음들은 무서운 소리를 내면서 부서졌고 부딪혔고 갈라졌다. 일행은 부대장 프랭크 와일드의 제안으로 개썰매경기를 하거나 카드를 하면서 재미있게 보냈다. 7월 26일 태양이 떠올랐으나 얼음을 빠져나갈 희망은 없었다. 폭풍에 배의 키가 망가졌고 식량이 모자라 펭귄과 해표의 고기를 먹었고 기름은 연료로 썼다. 그 동안 배는 점점 더 부서졌고 펌프로 퍼낼 수 없을 정도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10월 26일 사람들은 배를 포기하고, 보트 세 척과 개와 썰매와 식량처럼 반드시 필요한 물자들만 내려놓았다. 그들은 281일동안 얼음에 갇혔고 얼음에 갇힌 채 917km를 북서쪽으로 올라왔으나,실제거리는 2,410km 정도였다. 얼음 위로 내려온 그들은 텐트를 쳤다가 얼음이 갈라져, 텐트와 물자를 옮기면서 북쪽으로 떠갔다. 식량이 부족했어도 섀클톤은 대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힘썼다. 배는 얼음에 끼어 북서쪽으로 가다가 마침내 11월 21일 가라앉았다.
식량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 펭귄과 해표와 해표뱃속에서 물고기를 꺼내 먹으면서 버텼고 1916년 4월 초에는 마지막 남은 개들을 잡아 고기를 먹었다. 마침내 4월7일 낮에는 남쉐틀랜드 군도의 가장 북서쪽에 있는 클래어런스섬이 보였고 9일에는 그 옆에 있는 엘레판트섬을 향해 보트들을 띄었다.
마침내 14일에는 엘레판트섬 케이프 발렌티노에 상륙했다. 남조지아섬을 떠난 지 열여섯 달 반에 땅을 밟았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좋아 휘청거리며 웃었고 떠들거나 자갈을 손안에서 굴렸다. 이제 그들은 적어도 바다에 빠질 염려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륙한 곳이 민물이 되거나 폭풍이 불면 파도에 덮일 염려가 있어. 사흘 후 케이프 와일드로 옮겼다. 그곳은 펭귄의 군서지로 양계장처럼 냄새는 났어도 파도에 잠길 우려는 없었다.
섀클튼은 구조를 요청하기로 결심했다. 북쪽에 있는 포클랜드 군도가 남조지아섬보다 가까웠으나, 그는 풍향과 해류를 보고, 남조지아섬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목수는 뚜껑을 덮듯이 제임스캐어드호를 판자로 덮었고 돛대를 세웠다.
그는 4월 24일 부활절 월요일 동료 5명과 함께 떠났다. 그들은 작은 돛단배로 죽음의 순간을 여러 차례 넘기면서 남빙양 1,300km를 항해해 5월 10일 남 조지아섬의 서쪽 하콘 만에 상륙했다.
그러나 고래잡이 기지는 2천m가 넘는 빙하와 얼음과 눈으로 덮인 산을 넘어 27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섀클튼은 상태가 좋지 않은 두 사람과 그들을 돌 볼 사람을 남겨놓은 채,동료 두 사람과 함께 19일 새벽 그 산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미끄러지고 떨어지고 뛰어내리고 빠지고 쓰러지고 얼음물을 뒤집어쓰며 걸어서 결국 고래잡이 기지에 도착했다.
그들이 그 섬을 가로지를 때까지 해안에서 섬 안쪽으로 1.6km를 들어간 사람은 없었다. 엘레판트섬에 남아 있던 22명은 보트 두 척을 엎어놓고 그 아래서 1916년 겨울을 넘기다 8월 30일 모두 구조되었다. 결국 섀클튼은 한 사람도 잃지 않아, 남극탐험사상 유례가 없는 단체생존의 기록을 세웠던 것이다.
28명이 20개월에 가까운 조난상태에서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돌아온 것 자체가 대단하여, 탐험의 큰 부분들을 보지 않지만,그 부분 하나하나도 그야말로 위대한 탐험이다. 얼음에 갇혀서 아홉 달 이상을 떠다녔고 얼음 위에 내려와서도 넉 달 이상을 견뎠다. 구조를 요청할 길이 없어 험악한 남빙양을 겨울에 돛단배로 건넌 것만도 위대한 항해였다. 이어서 남조지아섬을 횡단한 것도 보통 사람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모험이다.
어떤 역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섀클튼의 용기와 인내력과 통솔력, 한 마디로 그의 능력은 보통 사람의 상상을 넘어선다. 그러므로 그는, 위에서 말한 대로, 남극탐험 사상 위대한 탐험가로 인정받는다.
남극대륙을 종단하려고 남극대륙으로 가다가 돌아섰어도 남극대륙 종단과 비교할 수 없는 업적을 세웠다는 것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섀클튼은 1921년부터 대서양쪽 남극대륙의 해안 3,200 km를 탐험할 계획을 세워 준비하다가 1922년 1월 5일 새벽 남조지아섬에 정박했던 탐험선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면서 남극 탐험사에서 ‘영웅들의 시대’를 끝맺었다. 그의 부인은 위대한 탐험가의 부인답게 특별히 요청해 남 조지아섬에 묻었다.
다글라스 모슨(1882-1958) 경은 영국 요크셔에서 태어나 어려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을 갔다. 시드니대학교에서 지질학을 공부했던 그는 1907년부터 시작했던 첫 번째 남극탐험에서는 어네스트 섀클튼 경의 남극탐험대에 물리학자로 참가했다. 그 탐험에서 그는 시드니 대학교 지질학 스승인 태넛 윌리엄, 에지워드 데이비드(1858-1934)교수와 함께 에레부스 화산을 등반했으며 1909년 1월 15일 자남극점에 도달했다. 자남극점은 1831년 영국의 제임스 클라크 로스가 찾아 헤맨 이래, 드디어 그들 세 사람이 처음으로 정복하게 된 곳이다.
출발 전 – 메르츠와 니니스(왼쪽부터)가 출발 전에 개썰매를 앞에 놓고, 오른쪽은 머피.
모슨은 스코트가 자신의 남극탐험에 참가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모슨 자신이 남극을 탐험하려고 비용을 모았다. 그는 그 비용으로 나무로 만든 35년 된 600톤짜리 물개잡이 배 “오로라”호를 준비해, 1911년 12월 2일 오스트레일리아 타스마니아섬의 남쪽에 있는 호바트를 떠났다.
“오로라”호를 조정하던 선장과 선원들은 남극대륙으로 가까이 오면서 얼음이 없는 곳을 찾아 항해했다. 그들은 1912년 1월 1일 동남극 빅토리아랜드의 케이프 아다레에 왔다. 그러나 그 해에는 두꺼운 얼음이 그 부근에 있어 그들은 상륙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얼음해안을 피해 서쪽으로 가, 아델리 랜드인 동경 142° 부근에서 마음에 드는 상당히 큰 만을 발견했다.
그들은 아델리펭귄과 웨들해표가 많은 그 만을 영연방을 뜻하는 컴먼웰스 만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탐험대는 1월 8일 그 옆에 있는 작은 땅에 상륙했다. 그는 그 곳을 케이프 드니슨이라고 불렀고 겨울을 넘길 기지인 케이프 드니슨을 안쪽에 지었다. 그는 게임이나 음악이나 토론이나 음식 만들기 같은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면서 1912년 겨울을 지루하지 않게 보냈다.
눈을 파고 나와 – 니니스가 죽은 다음 모슨과 메르츠가 썰매 날과 여분의 텐트를 써 임시로 만든 텐트에서 나오는 모습
모슨은 1912년 겨울을 넘긴 다음, 동료 벨그라브 니니스와 자비에르 메르츠와 함께 1912년 11월 중순 썰매 세 대로 동남극 조지 5세 랜드를 탐험했다. 스키를 타고 앞서 가던 메르츠가 눈에 덮인 크레바스에 빠져 실종되었다. 그들은 한 순간에 동료 한 사람과 중요한 물자들과 개먹이 전부가 실려 있는 썰매를 잃어버렸다.
남은 두 사람은 기지로 돌아오면서 식량이 거의 떨어져, 약한 개를 잡아 강한 개를 먹였고, 그들이 가지고 갔던 식량 조금과 개고기로 연명했다. 그러나 그들이 기지에서 160 km 정도 떨어진 곳에 왔을 때인 1913년 1월 7일 한밤중, 토하고 배가 아파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메르츠가 헛소리를 하다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모슨은 “몇 시간이고 나는 슬리핑 백 속에 누워 있었다. 지나간 일이 생각나고 앞날을 생각했다. 지구의 넓은 해안에 나 혼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 자신도 아무 때라도 쓰러질 것 같다. 발가락 몇 개는 끝이 검어지기 시작했고 곪았고 발톱도 너덜거리기 시작했다. 희망은 없어 보였다. 슬리핑 백 속에서 자고 싶고 바깥 날씨는 대단히 나쁘다”라고 그 때의 심정을 담은 당시 일기를 탐험기에 담았다.
얼음 채집 – 케이프 드니슨 기지에서는 바람이 너무 세서, 마실 물을 만들려 제대로 서서 걷지 못하고 기어서 얼음을 채집했다.
8일 아침 모슨 경은 정신을 차려 메르츠의 시체를 슬리핑 백 속에 눕혀 얼음 속에 묻고 썰매 날로 십자가를 만들어 세웠다. 그는 무게를 줄이려고 주머니칼로 썰매를 반으로 잘랐다. 그는 날씨가 좋은 11일 출발해, 13일 메르츠빙하가 보이는 곳까지 왔다. 그 빙하를 지나면 은신처가 있어, 그는 자신을 가졌다. 그러나 그의 체력은 완전히 소진되어 15일 겨우 1.6km 정도를 걸었다. 그는 17일 크레바스에 빠져, 4.3m짜리 줄에 걸려 있다가 기적처럼 빠져나왔다. 그는 마침내 19일 빙하를 건너와 눈이 덮인 비탈에 텐트를 쳤다. 그는 하루에 8.8 km에서 4 km를 걸으면서 은신처를 향하여 돌아왔다.
그때쯤 몸속에 큰 변화가 생겼던지 손의 피부가 벗겨지고 턱수염과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지기 시작했다. 26일에는 바람에 밀려 14.4 km나 갔고 27일에도 12.8km나 갔다. 그는 은신처에 가까이 오면서 낯익은 지형들이 보여 자신감은 한 층 높아졌다. 그날 저녁 그의 수중에는 작은 개먹이 20개 정도와 비상시에 먹으려고 보관했던 반 파운드의 건포도와 몇 온스의 초콜렛이 있었다.
그러나 29일 그가 8 km 쯤 왔을 때 기적이 나타났다. 곧 그는 그들 세 사람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만든 눈 더미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들은 눈 더미 속에 은신처의 위치를 적어놓았다. 마침내 그는 2월 1일 오후 7시 그 얼음은신처에 도착했다. 그는 날씨가 나빠 그 곳에 일주일 동안 있다가 9일 비틀거리면서 동료들이 있는 케이프 드니슨으로 갔다.
줄인 썰매 – 혼자 남은 모슨은 썰매의 무게를 줄이려고 주머니칼로 썰매를 잘라 반으로 만들었다.
모슨은 고국으로 돌아온 뒤, 1914년 3월 결혼했고 6월 경(卿 Sir)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와 탐험결과를 정리해 발표했다. 그는 1920년 아델라이드 대학교의 지질학교수가 되었으며 1929년부터 1931년까지 두 번의 여름에 걸쳐 동 남극 해안을 탐험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남극영토를 주장하는 데 큰 이바지를 했던 그는 1952년에 은퇴했으며 1958년에 돌아갔다. 그는 남극탐험사상 “영웅의 시대”의 대장 가운데 마지막으로 돌아갔다.
그는 어네스트 섀클튼(1874-1922) 경과 로버트 팔콘 스코트(1868-1912) 대령과 함께, 영국이 자랑하는 3대 남극탐험가이다. 모슨과 함께 기지로 돌아오다가 죽은 메르츠는 훗날 비타민 과다섭취에 따른 비타민중독으로 죽은 것으로 밝혀졌다. 곧 육식수의 간을 날로 먹으면, 비타민 A가 몸속에 쌓여, 먹은 사람이 죽는다. 비타민 A는 비타민 C와 달리 소변으로 배출되지 않고 축적된다고 한다.
영국의 남극탐험가 로버트 스코트(R. Scott 1868-1912)는 남극점 정복을 준비하면서 남극에서 1911년 겨울을 보냈다. 그 때 에드워드 윌슨(E. Wilson 1872-1912)과 헨리 로버슨 바워스(H. R. Bowers 1883-1912)와 동물연구조수인 앱슬리 체리-가라르드(A. Cherry-Garrard 1886-1959)는 황제펭귄의 알을 채집하려고 남극의 겨울에 모험을 했다.
왜 그들은 황제펭귄의 알을 채집하려고 했을까? 황제펭귄의 알을 구하려고 스코트의 1차 남극탐험에 참여했던 윌슨은 황제펭귄의 알이 새끼가 되어 가는 부화과정의 초기단계를 잘 관찰하면, 파충류의 비늘과 새의 깃털사이의 관계를 밝힐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런 사실이 밝혀지면, 모든 새의 기원을 연구하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윌슨을 포함한 세 사람은 1911년 6월 27일 아침 11시에 케이프 에반스에 있는 그들의 기지를 나섰다. 오전이라 해도 그 시기는 남극의 한겨울이라 태양이 지평선 아래에서 나타나지 않을 때여서 희끄무레 하지도 않고 캄캄했다. 그들의 경로는 처음 30 km는 얼어붙은 바다이고, 다음 48 km는 로스 빙붕이고, 마지막 25 km 정도는 로스 섬의 해안으로, 로스빙붕의 얼음이 울퉁불퉁하게 쌓인 곳이다. 로스빙붕(氷棚) 위에는 다른 곳에 견주어 바람이 없어서 눈이 쌓인다.
1911년 겨울 황제펭귄의 알을 찾아 나선 스코트 남극탐험대
그들은 비스킷 66 kg, 말린 쇠고기 50 kg, 버터 9.5 kg을 넣어 6주 분의 식량과 기름 27리터와 텐트, 침낭 등 모두 343kg의 짐을 길이 2.7m짜리 썰매 두 대에 싣고 떠났다. 날씨가 좋고 눈의 상태가 좋아도, 세 사람이 이 정도의 무게를 끈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처음에는 썰매 두 대를 한 줄로 매어 놓고 세 사람이 함께 끌었다.
그들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텐트를 치고 음식물을 조리해야했고 당연히 날이 밝을 때보다 고생이 더 많았다. 보통 하듯이 한 사람이 일주일간 조리하는 식으로 돌아가면서 매일매일 조리하기로 했다. 그들이 기지가 있는 지역을 벗어나 해빙 위에 올라섰을 때 기온은 -44℃였다. 다음날 로스빙붕에 거의 다 와서는 기온이 -49℃로 떨어졌다. -49℃에서는 공기가 워낙 차가워 숨을 쉬는 것도 고통이었다.
썰매를 끌고 갈 때에는 땀이 옷에서 얼음이 되어 한기가 섬뜩섬뜩 들어 마치 철로 만든 차가운 갑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쯤 체리-가라르드는 -44℃에서 장갑을 벗었다가 열 손가락이 동상에 걸려서 고통을 당했다. 동상은 생명에는 직접 관련이 없겠지만 극지에서는 불편하고 귀찮은 부상이다.
로스빙붕에 올라와서는 발이 모래알 같은 눈에 빠지고 눈이 썰매 날 사이에 끼어 썰매 두 대를 한꺼번에 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릴레이를 하는 식으로 한 대씩 썰매를 옮겨 놓았다. 6km를 걸어도 실제 전진 거리는 1/3인 2km인 것이었다.
체리-가라르드의 생각으로는 하루에서 가장 괴로운 시간이 그들이 침낭 속에서 쉬는 일곱 시간이었다. 자면서 내복과 몸에서 나온 수분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얼음이 되어서 침낭을 강철처럼 단단하고 차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침낭이 이렇게 차가워질 때면 그는 쉬는 시간을 줄이고 계속해서 전진하고 싶었지만, 대장인 윌슨의 생각은 달랐다. 윌슨은 사람이 쉬어야 다음에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침낭 속에 누워있는 시간이 괴로워도 꼭꼭 쉬면서 갔다.
빙붕 위에서 기온은 더욱 내려가 7월 5일에는 -61℃까지 내려갔으며 하루 종일 -51℃보다 높아진 적이 없는 날도 있었다. 그들은 매일 아침 더운 고기수프와 비스킷을 먹고 차를 마시고 텐트에서 나와 반쯤 웅크린 자세를 취했다. 그렇지 않으면 옷이 얼어 썰매를 끌기에 아주 불편했기 때문이다. 기온이 워낙 낮아 몸에서 땀이 나면서 입은 옷이 사람의 모양대로 얼어붙기 때문에 자세를 잘 취해야 했다.
그들은 목적지에 거의 다 와서는 밤에도 전진했다. 그래도 낮은 잠시라도 희끄무레하게 보이긴 했지만, 밤은 달이 있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글자그대로 칠흑(漆黑) 같았다. 또한 비록 달이 뜬다 해도 구름에 가리면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두운 밤에는 그들은 마치 눈먼 벌레처럼 얼음덩어리와 크레바스 사이를 기다시피 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드디어 그들은 7월 15일 황제펭귄의 군서지(群棲地)에서 조금 떨어진 높은 곳인 놀이라는 작은 화산의 기슭에 왔다. 펭귄의 군서지 부근에 온 그들은 바람도 막고 며칠이라도 견디려고 그 곳에 돌덩이를 모아 크기가 2.4m에 3.6m 정도의 은신처를 지었다.
그들은 기지에서 가져 온 두꺼운 돛베로 지붕을 덮고 은신처의 벽을 막았으나 남극의 겨울바람을 막기에는 부족했다. 바람에 텐트가 날아가 은신처를 지은 그들은 과학연구보다 더 급한 현실문제로 펭귄을 잡아야 했다. 바로 연료로 쓸 펭귄의 기름덩어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기름을 적지 않게 가져 왔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황제펭귄 한 마리의 무게는 40kg에 가까워 한 마리만 잡아도 두툼한 껍질과 기름을 상당히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7월 20일, 은신처가 있는 높은 곳에서 펭귄의 군서지로 간신히 내려 왔다. 그러나 그 곳에는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펭귄이 겨우 100마리 정도밖에 없었다. 1902년과 1903년 당시에는 그 곳에 펭귄이 2천 마리나 있었는데, 그때와 너무나 차이가 컸다.
그들은 부지런히 서둘러 펭귄 세 마리를 잡아 껍질을 벗기고 알 다섯 개를 모았다. 그리고 장갑 속에 알을 넣고 썰매가 있던 험한 언덕꼭대기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체리-가라르드의 장갑 속에 있던 알들이 깨어져, 하나는 버리고 하나는 수프에 넣어 먹었다.
그 때에는 기온이 낮고 바람이 워낙 강해 그들은 유난히 심한 추위에 고통을 받았다. 체리-가라르드는 훗날 자신의 책에 “그런 극심한 고통을 표현할 수 없다. 미치거나 죽으면 고통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여행을 시작하면서 죽음을 친구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나는 벌써 알고 있다”라고 썼다. 윌슨은 “일이 좋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 날 밤 그들이 자고 있을 때, 심한 눈보라에 강한 바람이 불어 은신처의 문에 쳐두었던 텐트가 바람에 날아갔다. 그들은 어두움과 눈보라 속으로 날아가는 물건들을 급히 붙잡았다. 기온이 아주 낮고 강한 바람이 불며 눈보라가 날리는 곳에서 돌아갈 텐트 없이는 그들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강한 바람에 지붕으로 덮어놓은 돛베가 갈갈이 찢어졌다. 돛베가 찢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나 바람이 워낙 강해 무참하게 찢어졌다. 이제 그들이 의지할 것이라고는 속에 얼음이 얼어붙은 순록가죽으로 만든 침낭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은 그 눈보라 속에서 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친구가 옆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바워스는 그때까지 간직했던 사탕을 꺼내어 7월 23일 일요일 윌슨의 서른아홉 번째 생일을 축하했다. 그들은 눈보라와 바람 속에서 꼬박 이틀을 굶었고, 사흘 째 되던 날 바닥에 깐 것을 뒤집어쓰고 스토브로 불어치는 바람을 막아 쇠고기수프를 끓여먹었다.
다음 날 다행히 바워스가 36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텐트를 찾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텐트는 찢어진 곳도 거의 없었다. 8 kg의 침낭이 얼음으로 20 kg이 돼 그들은 7월 25일 기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기온이 상당히 올라가서 추위보다는 피곤한 것이 더 무서운 적이 되었다. 몸이 너무 피곤해 걸어오면서 자다가 다른 사람에게 쿵쿵 부딪혔기 때문이다. 곧 날씨는 다시 추워졌고 그들의 몸이 피곤해지면서 걷는 속도는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로스 빙붕 위를 올 때, 바람이 없어 눈이 쌓인 곳에서는 올 때처럼 릴레이 하듯이 썰매를 옮겨 놔, 하루 7km에서 12km를 왔고 어느 날은 2.4km밖에 못 왔다. 드디어 그들은 7월 31일 케이프 아르미타즈에 있는 은신처에 도착했다.
이제는 그들의 고통이 다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기지로 갈려고 마지막으로 짐을 쌀 때, 윌슨은 조용한 목소리로 “두 사람이 고생한 것을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나는 살아가면서 여러분 두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두 사람에게 깊은 고마움을 표했다.
체리-가라르드는 그 말을 듣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남극탐험이 우리가 상상하듯이 그렇게 가혹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듣듯이 그렇게 지독한 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했었으나 “이번 탐험만큼은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다. 어떤 말로도 이번 탐험의 공포를 표현할 수 없다”고 썼다.
드디어 그들은 8월 1일 오후 열 시 기지에 도착했다. 그들을 본 누군가가 “하느님! 크로지에 팀이 돌아왔군요”라고 소리쳤다. 기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조마조마하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옷은 얼어붙어서 제대로 벗지 못해 가위로 잘라내어야만 했다. 아무리 온도가 낮아도 옷은 체온으로 따뜻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기온이 워낙 낮아 사람의 체온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체리-가라르드의 침낭은 떠날 때에는 8kg이었으나 돌아와서는 20kg이 되었다. 나머지 12kg은 바로 그의 땀이 얼어붙은 얼음의 무게였다.
그들은 남극의 겨울 36일 동안에 아무리 남극을 탐험하는 사람들이라도 하기 힘든, 가장 가혹한 왕복 210km의 여행을 하고도 살아서 돌아왔다. 이 탐험에 참가했던 사람 가운데 윌슨과 바워스는 스코트의 극점 정복반에 참가했다가 죽음을 당했다.
반면 앱슬리 체리-가라르드는 자신의 남극탐험기록을 <지상 최악의 여행 (The Worst Journey in the World)>이라는 책으로 만들어, 지금도 많이 읽히는 남극 탐험의 고전 가운데 한 권이 되었다. 한편 그들이 고생하면서 가져 온 황제펭귄의 알을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연구했으나, 윌슨이 기대하던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서른두 살의 지질학자인 오토 노르덴스쾰드(Otto Nordenskjold 1869~1928) 박사를 대장으로 한 스웨덴 남극탐험대가 1901년에 조직되었다. 이 탐험대를 태우고 갈 배는 물개잡이배였던 나무로 만든 탄탄한‘안타크틱(Antarctic)’호였다. 선장은 남극을 경험한 칼 안톤 라르센이며 선원은 열여섯 명이었다.
‘안타크틱’ 호는 1901년 12월 21일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 다음 해 1월 11일 남쉐틀랜드 군도에 도착했다. 노르덴스쾰드 박사는 “우리는 지금 인류가 와 본 적이 없는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날씨는 마술에 걸린 듯 변화가 심했으며, 우리를 마치 때려 부수려고 남쪽으로 유인하는 것만 같았다. 만사를 제쳐두고 우리는 위대한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개척자만이 느낄 수 있는 열의로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갔다” 고 그 때의 심정을 일기에 적었다.
이들은 과거에 알던 것과는 달리, 섬들이라고 생각되던 지역들이 연결되어 남극반도가 되었고 남극반도 서해안의 해협들이 연결되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당시 만해도 남극의 지리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때였다. 오토 노르덴스쾰드 박사는 남극반도 끝 동쪽에 있는 스노우 힐(Snow Hill) 섬에 화석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그 섬에서 그 해 겨울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2월 초순에는 목재와 부엌기구와 연구 장비와 썰매처럼 배로 가져 온 물자와 개를 내려 놨으며, ‘안타크틱’호는 포클랜드로 돌아갔다.
대장을 포함한 월동대 여섯 사람은 지구자기를 측정할 은신처를 먼저 짓고, 좁지만 그 속에서 얼마 동안 살았다. 뒤에 크기가 6.4 × 4.1m의 집을 나무로 짓고 겨울에 대비했다. 그들은 3월까지 날씨가 좋을 때, 개썰매와 보트로 물자를 날라 탐험에 쓸 식량과 연료를 보관할 창고를 몇 개 지었다.
1902년 겨울은 가혹해서 눈보라가 열흘을 계속해서 분 적이 있었으며 그 동안 기온은 계속해서 영하 30℃였다. 그들은 아무도 남극에서 겨울을 보낸 적은 없었지만 여섯 사람은 지혜를 모아서 살아갔다. 봄이 오자 대장을 포함한 세 사람이 썰매 한 대를 끌고 개들이 또 한 대를 끌면서 남극반도 동해안탐험에 나섰다. 잘 가면 하루에 48km도 갔으며 대장은 한 번 크레바스에 빠졌다가 겨우 구조된 적도 있었다.
대장은 “우리는 텐트를 칠 장소를 찾는데 긴 시간을 보내지 않아, 갈색으로 깎이고 큰 덩어리로 깨어진 바위가 불쑥 튀어나온 곳 아래 기슭의 얼음위에 텐트를 쳤다. 독자들은 서남극 본토 동해안 전체에서 처음으로 사람의 발에 밟힌 이 바위로 달려간 내가 어떤 심정이었나를 쉽사리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10월 18일 일기에 적었다.
그러나 날씨는 계속 나빴으며 불운이 겹쳐 한 사람이 팔을 다치고 텐트가 강풍에 날려갔다. 또한 개들이 먹이를 담아 둔 부대 자루를 발견해 한꺼번에 먹어버려, 대장은 그 때가 돌아갈 때라고 판단해 그곳에서 돌아섰다. 그들은 썰매로 지나간 얼었던 만과 빙붕을 탐험선의 선장을 기념해, 각각 ‘라르센 만’ 과 ‘라르센 빙붕’ 이라 이름을 지었다.
대장은 12월 초에는 스노우 힐 섬의 북동쪽에 있는 작은 세이무르(Seymour) 섬에 갔다가 대단히 귀중한 펭귄화석을 포함해서 흥미로운 화석들을 발견했다. 이 커다란 펭귄화석이 펭귄화석으로는 역사상 처음 발견된 것으로 크기가 거의 2m나 되었다.
다음 해인 1903년 1월이 다 가고 2월이 되어도 온다고 약속했던 ‘안타크틱’ 호의 소식은 없었다. 그 해 겨울 달력으로는 여름이 다 끝나지 않은 2월 18일에 남남서풍이 불어오면서 눈이 많이 오고 기온이 -10℃로 떨어졌다. 다음 날 저녁에는 바다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2월은 남극에서는 여름이 다 끝나지 않은 때이나 워낙 추운 곳이라 계절에 상관없이 바다가 얼기 시작했다. 그들은 얼어붙은 바다를 보고 이제는 배가 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춥고 황량한 남극에서 다시 1 년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무겁게 짓눌렸다.
여름에 오기로 약속했던 배 ‘안타크틱’ 호는 어떻게 되었을까? ‘안타크틱’ 호는 노르덴스쾰드 박사 일행 여섯 사람을 스노우 힐 섬에 내려놓은 뒤, 포클랜드 군도로 돌아와 1902년 겨울을 보내고, 지리학자인 군나르 안데르손을 남극으로 데리고 가려고 태웠다. 배는 1902년 11월 5일 두 번째로 남극으로 떠나, 11월 9일 남위 59˚30’에 왔을 때, 얼음에 갇혔다. 겨우 빠져 나왔다가 다시 갇혔다. 17일 부터 나흘간 폭풍이 불어 얼음도 약간 깨어졌으나 배도 위험해졌다.
그 때의 상황을 안데르손은 이렇게 적었다. “11월 21일 새벽 2시30분 선장이 함교에서 지르는 고함소리에 눈을 떴다. 급하게 옷을 주워 입고 갑판으로 나갔다. 배의 왼쪽으로 배 길이의 서너 배 거리로 떨어져 우리배의 돛대보다 훨씬 높고 길이가 배의 세 배는 되는 빙산이 보였다. 근처에 있는 얼음조각 때문에 ‘안타크틱’ 호는 바로 옆에 있는 산 같은 빙산 쪽으로 끌려 갈 위험에 있었다. 더욱 어려운 것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엔진을 최대로 올리고 돛을 활짝 폈다. 배는 한참 만에 겨우 몇 야드 앞으로 나갔다가 얼음에 다시 밀리곤 했다. 얼마 있다가 얼음조각들이 엔진과 돛의 힘으로 밀리면서 ‘안타크틱’ 호는 빙산을 지나 바람이 불어가는 쪽의 얼음이 없는 바다로 나섰다.”
마침내 탐험선은 침몰돼 배는 얼음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남쉐틀랜드 군도와 남극반도 서해안을 조사한 뒤, 남극반도 끝으로 올라와 월동대가 있는 스노우힐 섬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얼음이 하도 앞을 막아 배가 가기는 어려웠다. 라르센 선장이 경험이 많아 얼음 속에서 배를 이리저리 몰아 보았으나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안데르손과 듀제 대위와 토랄프 그룬덴이 썰매로 월동대를 데리러 가기로 하고, 12월 29일 남극반도 끝에 있는 호우프(Hope) 만에 올라왔다. 배는 갈 수 없어도 사람은 얼음 위로 걸어서 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때가 남극의 한여름인데도 빙산이 많아 ‘안타크틱’ 호는 다시 얼음에 갇혀 거의 2주일 동안을 이리저리 밀려다녔다.
드디어 1903년 1월 10일 배는 얼음에 끼인 채 솟아오르기 시작해, 그날 밤 늦게 오른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 때만 해도 스며드는 물의 양이 많지 않아 펌프로 물을 뽑아낼 수 있었다. 2월 12일 근처에 있는 폴레 섬으로 가던 중 배가 다시 얼음에 갇히면서, 물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해, 선장은 배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선원들은 아침 여덟시 배를 버리고 얼음 위로 내려왔다. 얼음 위에 내려 온 선원들은 불쌍한 눈으로 물에 잠기는 배를 바라보았으나 그들은 더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한 과학자는 “우리는 얼음 위에 한 줄로 늘어서서 한시도 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펌프는 아직도 움직이지만 그 소리는 작아져 갔다. 배는 천천히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갔다. 배의 이름이 물밑으로 사라졌다. 물은 천천히 올라오고 바닷물과 얼음조각이 출렁이며 조금 남은 갑판을 덮었다. 그 소리는 내가 죽을 때까지 결코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다” 라고 그의 일기에 썼다.
‘안타크틱’ 호는 곧 가라앉았으며 선장과 선원들은 이 때 폴레(Paulet) 섬에서 4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얼음 위로 내려온 선원들은 얼음 위에 텐트를 치고 배를 떠난 무서운 첫날 밤을 보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배가 없어진 것이 그들에게는 위안이 되어 모두가 몇 달 전보다는 잠을 더 잘 잤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어쩌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 도 있다는 새로운 불안이 생겼다.
선원들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면서 얼음을 타고 바다를 떠돌다가 다행히 17일 만인 2월 28일 무사히 폴레 섬에 올라왔다. 한편 호우프 만에 상륙한 안데르손을 포함한 세 사람은 지도를 갖고 대장이 있는 스노우힐 섬 방향으로 갔다.
그들은 스키를 타고 고생 끝에 80km 이상 떨어진 베가(Vega)섬까지 왔다. 그들은 그 남쪽의 바다에 얼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안타크틱’호가 쉽게 대장이 있는 섬으로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1903년 1월 13일 가벼운 마음으로 자신들의 은신처로 돌아왔다.
그들은 배를 기다렸으나 온다는 날짜에 배가 나타나지 않자, 하루 하루를 기다리다가 한 주가 가고 한 달이 갔다. 가라앉은 배가 올 리가 없었으나 그들은 배가 가라앉았으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2월 11일에는 은신처를 사람의 키 높이로 크게 만들어 겨울을 날 준비를 하였다.
그들은 일찍 온 겨울과 눈보라에 고생도 했으나 3월 11일에는 벽을 돌로 쌓고, 지붕은 낡은 방수포를 덮고 안에는 천막을 치고 바닥에는 펭귄껍질을 깔아 겨울을 날 은신처를 완성했다. 펭귄고기가 그들의 주요한 식량이 되어 그들은 700마리 정도를 먹었다. 가끔 해표를 잡았으며 얼음구멍에서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펭귄이나 물개의 기름은 참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비린내가 나고 태우면 시커먼 연기는 나지만 그래도 그 곳에서는 난방과 등잔의 훌륭한 연료가 되었다. 세 사람은 돌아가면서 음식을 만들었으며 즐겁게 생활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들이 살아남으려고 열심히 일하는 가운데 춥고 어두운 남극의 겨울은 빨리 즐겁게 지나갔다.
드디어 남극의 봄이 오는 9월 29일 그들 세 사람은 그 곳에서 막연하게 기다릴 수만 없어, 은신처를 떠나 대장이 있는 스노우힐 섬으로 떠났다. 그들은 10월 9일에는 가운데에 있는 베가 섬에 도착했으며, 지난 해 여름에 대장 일행이 만들어 놓은 식품창고를 찾아내었다.
그들은 동상을 치료하면서 이틀을 쉬고 전진을 계속했다. 남극에서 맞은 두 번째 봄에 월동대장과 대원인 조나센은 개썰매로 베가 섬까지 갔다. 하계 때 세 사람은 10월 12일 월동대장 일행 두 명을 정말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 순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안데르손은 “오늘 오후 한시에 점심을 해먹으려고 멈추었다. 해표떼들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 저기 번쩍 서 있는 물개는 무엇이냐?’ 누군가가 물었다. 그러자 ‘움직인다’ 라고 다른 사람이 소리쳤다. 조금 있다가 ‘사람이다! 사람이다!’ 라고 우리는 놀라서 모두 소리쳤다” 라고 당시의 장면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이 하도 이상해 처음에 대장은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의 모습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옷, 얼굴, 모자가 시커멓고 단지 나무로 이상하게 만든 안경 뒤에 두 눈 만이 반짝거렸을 따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비참한 인간들이 무슨 인종인지를 몰랐다” 라고 대장은 그의 일기에 썼다.
실제 그들은 해표와 펭귄을 잡아먹으면서 기름연기와 검정이 온몸을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호우프 만에서 겨울을 보낸 세 사람은 그들의 대장을 만났으나 그들을 데리러 온다던 ‘안타크틱’ 호는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한편 폴레 섬에 상륙한 선장과 선원들은 육지에 올라 와, 한 편으로는 마음이 놓였으나 다른 한 편으로는 무섭고 당황해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들의 배가 가라앉았고 그들이 작은 섬에 상륙했다는 것을 알려줄 방법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침착하게 돌을 모아 10 × 7 m 크기의 은신처를 바닷가에 짓고 펭귄을 잡아 식량으로 먹으면서 살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들이 1년을 살아가려면 펭귄 3~4천 마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는 1100 마리만으로도 충분했다. 가끔 잡는 해표와 물고기가 특별한 맛이 있는 별식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따뜻한 음식을 배불리 먹고 안전하게 구조되는 꿈을 수백 번 꾸었다. 남극의 겨울은 결코 쉽지 않아, 6월 7일 수 주일간 앓던 한 사람이 죽었다.
전진하는 스웨덴 탐험대 모습
남극의 봄이 오면서 10월 말에는 기다리던 대로 바다의 얼음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라르센 선장은 선원 다섯 사람을 데리고 100km 정도를 노를 저어 11월 4일 안데르손 일행 세 사람이 올라간 호우프 만에 상륙했다. 그들은 세 사람이 1903년 겨울을 보냈던 돌로 지은 은신처와 식품창고를 찾아내었다. 또한 그들이 플라스크에 그려놓은 그림으로 세사람이 스노우 힐 섬으로 떠난 길과 방향도 알아냈다. 선장 일행은 11월 7일 다시 스노우힐 섬으로 그들을 찾아가기로 결정하고 힘차게 보트를 저었다.
당연히 그 즈음에는 스웨덴과 아르헨티나에서는 탐험대의 안전을 걱정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안타크틱’ 호가 떠난 지 1년 가까이 되었으면서도 아무런 소식도 없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구조대가 만들어졌고 영국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관의 무관이던 훌리앙 이리사르(Julian Irizar) 해군대위가 아르헨티나의 구조대를 이끌도록 결정되었다. 구조대가 사용할 배는 아르헨티나 해군전함인 ‘우루과이(Uruguay)’ 호였다.
호우프 만에서 월동한 세 사람을 만난 대장은 10월 26일 세이무르섬으로 돌아와서 닻에다가 이름을 적어놓고 돌무더기위에 올려놓아 사람이 있다는 표시를 했다. 구조대는 11월 7일 세이무르 섬 가까이 왔으며, 상륙했던 그의 대원들이 닻을 발견해, 그 부근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리사르 대위는 배를 더욱 가까이 접근시켜 텐트가 보이는 곳까지 와 텐트 속에서 자고 있던 월동대원 두 사람을 깨웠다. 이리사르 대위와 다른 해군장교는 그들을 따라 월동기지까지 와서 대장 오토 노르덴스쾰드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대장은 구조대를 만나 반갑기는 했으나, ‘안타크틱’호의 행방을 모른다는 말에 크게 놀랐고 걱정했다. 그들은 잠자리에 누었다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 밖을 내다보니 놀랍게도 선장일행이 가까이 오고 있었다. 그들은 선장을 만나고 나서야 ‘안타크틱’ 호가 침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돌아오면서 폴레 섬에 남아있던 선원들도 모두 구조했다. 선원들이 배를 버리고 얼음위에 내린지 아홉 달 만이었다. 한편 전함 우루과이호가 남극으로 가면서 이 배는 역사상 남극에 온 최초의 전함이 되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 탐험에 참여해 2년간 월동한 아르헨티나 해군중위 호세 마리아 소브랄(Jose M.Sobral 1880~1961)을 기념해 그의 이름을 딴 기지를 남위 81˚05′, 서경 40˚30′ 필크너 빙붕 위에 세웠다. 또한 이들을 구조한 이리사르 대위를 기념해 현재 아르헨티나 남극연구를 지원하는 쇄빙선이 ‘알미란테(Almirante 제독) 이리사르’ 호이다. 이리사르 대위는 제독까지 진급했다.
남극 탐험하면 우리는 우선 아문센과 스코트를 떠올린다. 그러나 비록 남극점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아문센과 같은 기간에 남극을 탐험했던 아시아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2010년은 아시아의 위대한 극지 탐험가 시라세의 남극탐험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본인 노부 시라세는 1861년 아키타 현에 있는 절에서 일본 승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일찍이 극지탐험에 대한 의지를 굳히고 절에서 나와 군인의 길로 접어든다. 그러나 그의 극지탐험에 대한 의지는 일본 정부와 대중들의 무관심과 냉대로 말미암아 어려움에 부닥친다. 그때 전 일본 수상이었던 오쿠마 시게노부 백작 등이 조직한 남극탐험 후원회의 지원을 받아 1910년 12월 1일 간신히 남극 탐험에 오를 수 있었다.
결국, 시라세 남극 탐험대는 남극 로스 빙붕에 도착, 내륙으로 257km를 행군해 1912년 1월 28일 남위 80도 5분까지 전진할 수 있었다. 20세기 초였던 당시, 전 세계는 영국을 중심으로 한 몇몇 유럽 국가들의 패권주의가 극에 달했던 때였다.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은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을 바탕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약소국들을 무자비하게 식민지화함으로써 전 세계로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유럽 국가 간에 치열한 남극 탐험 경쟁이 벌어졌고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일본이 이 탐험 경쟁에 끼어들게 되었다.
동양인 최초의 남극 탐험가 노부 시라세(앞에서 둘째 줄 가운데)
그러나 시라세 탐험대는 국가적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스콧이나 아문센과는 달리 순수 개인 차원에서의 탐험이었다는데 더 큰 의의가 있다. 특히 시라세의 남극탐험은 당시 부유했던 유럽 탐사대와는 상대 되지 못한 빈약한 선박과 장비를 갖고 이러한 열세를 불굴의 정신력으로 이겨 냈다는 점에서 더욱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또한, 당시 아시아인들이 유럽인들에 대해 갖고 있던 열등감을 떨쳐 내는데 크게 이바지한 바 있다. 아래는 시라세 탐험대가 남극에서 일본으로 귀국 후 뉴욕 인디펜던트지에 게재된 인터뷰 기사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이 기사를 통해 당시 남극 탐험이 일본 정부나 국민에게서 어떤 대우와 평가를 받았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지금 우리나라 극지 사업과 비교해 볼 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고 여겨진다.
[ 1912년 10월 3일 목요일, 뉴욕 인디펜던트지 시라세 인터뷰 기사]
제1차 일본 극지탐험대“극점에 가는 일은 건장한 체격의 영국인들 혹은 부유한 미국인들이나 원한다면 하라고 하고, 우리는 남극에 안 가는 게 좋겠다. 우선은 돈도 없고 둘째는 위험한 탐험 같은 것은 우리 체질에 맞지 않는다.”
“이 말은 내가 남극 탐험을 위한 자금 지원을 요청했을 때 일본 정부가 내게 한 말이다. 정부의 이 같은 대답은 사실 당시 일본인들이 갖고 있던 일반적 생각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정부와 국민은 생각이 전혀 다르게 바뀌어, 일본 국민도 탐험에 대한 자질이 있다고 자부하게 되었다. 또한, 아무 소득 없는 짓을 돕는다는 생각으로 우리에게 재정 지원을 했던 사람들이, 이제 남극탐험이 단지 시간과 돈의 낭비가 아니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우리의 탐험에 대해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우리는 국민적 호응 없이 출발하여 거국적인 관심과 인정을 받으며 귀환하게 되었다. 1910년 나는 의회에 극지탐험을 위한 지원 비용으로 10만 엔(미화 5만 달러)을 신청했었다. 이 예산은 하원을 통과했으나 상원에 가서 미화 1만 5천 달러로 삭감되었다.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사업이 충분한 교육적 가치가 있다고 믿고 문부성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나는 이 자금이 우리 탐험대를 위해 효율적인 장비를 충분히 사들이기 위한 액수라는 점을 조심스레 설명했다. 문부성 관리는 나의 제안에 실소를 금치 못하며, 그에 대해 위와 같이 대답했다.
또한, 관리들은 5만 달러 정도의 적은 돈으로 어떻게 극지 탐험을 할 수 있을지 이해할 수 없기에 지원을 정중히 거절하면서, 마지막으로 그런 바보 같은 사업은 그만두고 극지탐험 같은 것은 돈 많고 우리보다 신체적으로 우월한 유럽 사람들한테 맡기라고 충고한 것이다.
정부와 더는 시간을 끄는 것은 무의미했다. 정부 관리들과 논쟁하는 것은 마치 벙어리 돌부처와 얘기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정부에서는 한 푼도 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마지막 기대를 걸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지지와 지원을 호소했으며 그로부터 반응이 있었다. 언론으로부터 열렬한 지원을 받았다. 동경에 있는 한 잡지사는 단독으로 2천5백 달러를 모금했다. 나의 계획은 특히 학생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아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코 묻은 돈을 헌금했다.
대세가 우리 쪽으로 기울자 이제 정부가 끼어들어 쓸데없는 참견을 하며 방해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수리비 5만 달러를 낼 수 있다면 고물 선박 한 척을 써보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러한 제안의 배경에는 우리 자금으로는 쓸 만한 선박을 사들일 수 없을 것이므로 반쪽짜리 불충분한 준비 상태로 비추어 볼 때 앞으로 예상되는 비참한 실패는 국가의 불명예가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를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이러한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대신 우리는 범선 한척을 샀다. ‘카이난 마루(남극 선구자)’ 라고 명명한 그 배를 즉시 극지 항해에 맞도록 수리했다. 모금액 중에 1만 달러가 선박 장비에 쓰였고, 1만 5천 달러는 과학 장비, 의복, 식품 등의 구매에 사용되었다.
우리는 일본의 첫 극지 탐험이 인류 역사상 가장 저렴하고 작은 규모였다고 믿는다. 탐험대는 아이누 족 2명을 포함한 27명의 대원과 30마리의 아이누 개로 구성되었다. 그 선박은 지금까지 남극으로 항해한 역사상 가장 작은 선박이었다. 카이난 마루는 오크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양옆의 높이는 수면에서 불과 60cm에 불과하다. 배 크기는 길이 30.5m, 폭 7.6m, 배수량 204톤이다. 동력은 돛대를 이용한 풍력과 함께 18마력짜리 보조 엔진을 달았다.
결국, 1910년 말 우리는 남극으로 출발할 준비가 완료되었다. 외국의 탐험대가 준비에 수십만 달러를 쓴 것을 볼 때 우리 탐험대는 형편없이 작은 규모였던 것 같다. 실제 이 점이 모두에게 우리 탐험을 회의적으로 보게 한 것 같다.
지식인층은 우리의 과학 장비가 매우 열악하고, 참여 과학자들은 정밀 과학연구 하기에는 수준이 미달한다고 생각했다. 상공인들은 소득 없이 끝날 것이 뻔한 일에 재정 지원한 것을 후회했었다.
실제로 학생들을 제외한 모두는 우리가 그런 소형 선박으로 뉴질랜드까지만 간다 해도 기적과 같은 성과라고 생각했다. 실제 노무라 선장의 항해술이 없었다면 우리 배는 곧 바다 밑에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가 열악한 수준의 선박을 끌고 남빙양의 거친 폭풍과 파도를 헤치며 사고 없이 3만 마일의 항해를 마친 것은 거의 기적과도 같았다.
탐험 결과와 항해에 대한 불길한 전망과 혹독한 비판 속에서 ‘남극 선구자’ 호는 결국 1910년 12월 1일 동경만을 출발했다. 그것은 역사상 가장 슬프고 우울한 극지 탐험대 환송식이었다. 비록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우리 탐험대의 순항과 성공을 기원하는 몇몇 학생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았다.
조국에서의 초라한 출발 장면은 우리의 결의를 약화시키기보다는 더욱 강하게 만드는 생생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확실한 것은 우리의 장비가 애초에 바라던 만큼 완벽하게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대원들의 결의와 용기를 우리 탐험대가 가진 자산 중에서 가장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었다.
일본 최초로 남극탐험을 수행한 노부 시라세는 일본의 남극 관측선 ‘시라세’호로 그의 이름을 남겼다.‘남극 선구자’ 호는 출발 70일 후인 이듬해 2월 8일 뉴질랜드 웰링턴에 도착했다. 우리는 이미 남극으로 출발하기에 수개월 늦어 있었다. 우리의 원래 계획은 스콧과 동시에 1909년 7월 1일 출발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가능한 한 최대한 뒤로 미루자고 결정했었다. 우리는 남위 55-60도 사이에 거친 바다를 건너 3월 1일 쿨만(Coulman) 섬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더욱 남쪽으로 가면서 바다에 떠 있는 많은 빙산과 얼음 쪼가리들 때문에 항해가 늦어졌다.
우리는 적어도 맥머도 섬과 에레버스 산까지 가는 길에 있는 고래만(Whales Inlet)까지 도달하기를 희망했으나, 그해 하계 시즌에 너무 늦었기 때문에 포기하고 남극으로의 차기 항해를 준비하기 위해 시드니로 귀환했다.
그리고 출발이 지체됨에 따라 다른 나라 탐험대와의 경쟁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있음을 깨닫고, 우리는 원래 극점에 도달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는 대신 차기 탐험에서는 남극해의 지형과 과학연구에 몰두하려고 결정했다.
5월 1일 우리는 시드니에 도착하고서 노무라 선장과 몇 명의 대원을 추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으로 보냈다. 나머지 대원들은 시드니에 내려 개인 집 정원에 텐트를 치고 노무라 선장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것은 간절한 기다림이었다. 우리의 모든 자금은 거의 소진되어 매일 식량이 모자랐다. 우리는 궁핍과 기아 상태에 도달해 거의 거지와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뉴질랜드 언론은 우리의 탐험을 멍청하다고 보았다. 특히 뉴질랜드 타임스는 우리를 신랄하게 비평했다. 우리를 마치 비참한 포경선에 승선한 고릴라 집단으로 보고, 극지방은 우리와 같은 밀림의 야수들이 가는 곳이 아니라고 혹평했다.
우리를 짐승들이라 한 것은 아마도 상징적 표현이겠지만, 많은 호주인들은 이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남극점을 정복하겠다는 황당한 생각에 이끌린 살아 있는 고릴라들을 보기 위해 연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우리는 이 상황을 장난이란 것을 알고 있었으나 매우 당황하였다.
시드니 대학의 데이비드 교수가 우리 캠프를 방문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가 인간이며 과학 장비들을 효율적으로 갖추고 있다고 인정받았다. 그 후로 우리는 많은 호주 여성으로부터 꽃다발을 받는 부러운 존재가 되기도 했다.
노무라 선장은 자금을 모아 10월 늦게야 돌아왔다. 1911년 11월 19일 ‘남극 선구자’ 호는 남극해로의 2차 항해에 나섰다. 그때는 남극 여름이 한창인 시기였다. 남위 63-64도 사이에서 빙산들을 만나기 시작해 남쪽으로 갈수록 서서히 증가했다. 남위 66도에서 배는 두꺼운 얼음층을 만나 며칠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우리의 항해는 점점 어려움을 넘어 극한의 상태로 나아갔다.
그러나 노무라 선장의 노련한 항해술로 수일의 항해 끝에 남위 78도, 동경 146도에 있는 만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그곳을 카아난 만으로 명명하였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빙하 때문에 그곳에 상륙하기가 불가능했으므로 상륙에 적합한 곳을 찾아 서쪽으로 40마일을 이동했다. 후에 우리는 이곳에서 서쪽으로 6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프람 호와 근처에 아문센 캠프를 발견했다. 그들은 거기서 아문센 탐험대가 극점으로부터 귀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상륙하기로 선정한 지역에는 수 마일에 걸쳐 높이 100m에 달하는 얼음 장벽이 가로막혀 있었다. 얼음 나라에 상륙하는 유일한 길은 그 얼음 장벽을 넘어가는 것이었다. 이것은 실로 로스, 쉐클턴, 스콧, 아문센 등은 넘기 불가능했던 일대의 위업이었다.
아문센이 상륙했던 곳의 얼음 장벽은 고작 12m에 불과했으며, 그곳에 오르기 위해 1달을 보내야 했다. 우리는 소위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오를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우리는 거의 수직인 빙벽에 지그재그 형태로 얼음길을 파냈다.
모든 대원이 온 힘을 다해 결국 60시간 만에 첫 번째 대원이 빙벽 위에 오를 수 있었다. 프람 호 승무원들은 처음엔 우리를 비웃다가 성공하자 진심 어린 찬사를 보냈다. 나를 포함한 4명의 팀이 설원에 남고 나머지는 배를 타고 킹 에드워드 7세 랜드를 탐험하기 위해 떠났다. 여기까지 선박 팀에게는 행운이 따랐고 성공적이었다. 200 마일을 항해 끝에 킹 에드워드 7세 랜드에 무사히 도착했으며 그곳에서 처음으로 일본 국기가 휘날렸다.
상륙하기 직전 그들은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다. 즉 선박이 얼음 해안에 접근 했을 때 암석이 박힌 얼음 덩어리들이 해안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그 암석들을 갑판으로 끌어올려 가져 왔는데, 이것은 역사상 남극으로부터 가져온 첫 번째 암석이었다.
육상팀은 상륙하여 내륙으로 30마일을 탐험했는데 거기서 또 다른 중요한 발견이 우연히 이루어졌다. 대원들은 육지라고 추측되던 설원이 파도 치듯 일정하게 굴곡져 있음을 느꼈다. 이것은 킹 에드워드 7세 랜드가 남극 대륙의 일부라는 오래된 가설에 반하는 것이다.
이런 커다란 지리학적 의문을 풀어줄 많은 사진과 과학 자료가 모아졌다. 채취된 암석과 과학조사 결과는 최종 검증을 위해 캠브리지 대학에 보내질 예정이다. 어쨌든 이러한 조그마한 과학적 기여가 우리의 힘든 여정과 고된 탐험에 충분히 보상이 된다고 느낀다.
나머지 우리 항해는 다음과 같이 간략히 요약될 수 있다. 탐험대는 고래만에서 다시 합류하여 시드니를 경유 일본을 향해 출발했다. 남극 선구자 호는 지난 6월 20일 동경만에 귀환했다. 조롱과 질책으로 우리를 떠나보냈던 사람들이 몸소 나와 열렬한 찬사로 우리를 환영했다. 수천 명의 인파가 열광적으로 남극 탐험대를 격려했다. 우리의 귀환을 기념하기 위해 그날 저녁 동경 시내에서 대형 종이 등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이상이 우리 남극 탐험의 간략한 소개이다. 많은 예상치 못했던 장애와 상황들 탓에 탐험의 진행이 더뎌졌으며 실패할 수도 있었다. 우리가 처했던 상황들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결과에 만족한다. 적어도 우리가 이룬 것들 덕분에 5만 달러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일반적 인식을 훌륭한 항해술과 불굴의 용기로 바꿀 수 있었다.
또한, 우리는 일본인들도 유럽인들 못지않게 탐험을 할 능력이 있으며, 더 열악한 방한복을 입고 추위를 견딜 수 있고 더 적은 음식을 먹으며 일을 할 수 있는 점에서 유럽인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우리는 극 지역에서 털 달린 상의와 장갑을 제외하고 일본의 겨울철에 입는 보통 옷을 입었다. 항해 중 매일 우리의 식단은 1kg 정도의 빵, 비스킷, 통조림 정도였으며, 상륙 시에는 식량을 반으로 줄였다. 대원들은 그 정도의 의복과 식량으로 어떤 힘든 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효율적이었다. 바로 이점이 내가 말하는 ‘일본인들도 다른 나라 사람들과 견주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우리 남극 탐험이 어떤 가치가 있으며, 얼마나 경제성이 있는지를 숫자로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적절치 않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면에서 평가했던 사람들은 우리를 강하게 비난했었다.
나와 ‘남극 선구자’ 호 대원들은 이러한 부적절하고 일부 악의적 평가들을 무시하고 인류 보편적 평가를 기다릴 것이다. 우리는 그 당시 상황에서 온 힘을 기울였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편, 우리 극지 탐험대는 일본인의 가슴 속에 숨은 불씨에 불을 지폈고, 우리의 탐험 정신과 열망 탓에 이미 많은 이들이 탐험에 도전하고 있다. 진정 나는 망설이지 않고 말하겠다. 만약 정복해야 할 극점이 남아 있다면 일본인이 처음으로 도달하게 될 것이며, 그들은 ‘남극 선구자’ 호 대원들이 받았던 것보다 훨씬 적극적인 국민적 지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글 : 김예동 전 극지연구소장)
아문센(Roald Amundsen, 1872∼1928)은 오슬로 남동쪽 70km 정도 되는 곳에서 선주이자 선장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영국 존 프랑크린(Sir John Franklin, 1786∼1847) 경의 1819/25년 캐나다 육로탐험기를 읽고 극지탐험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나아가 그는 프리초프 난센(Fridtjof Nansen, 1861∼1930)의 그린란드 횡단에 그 결심을 굳혔다. 그는 스키를 배우기 시작했고 개썰매의 장점을 알았다. 한편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의사로 만들려고 해, 그는 크리스챤대학교 의학부에 등록했으나, 그가 21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자, 의학을 그만 두었다.
1911년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로알드 아문센
아문센은 1897/99년에 걸쳐 벨기에 아드리안 드 겔라쉬(Adrien de Gerlache, 1866∼1934) 남극탐험대 탐험선 벨지카(Belgica)호에 1등 항해사로 참가해, 남빙양에서 1898년을 월동하면서 남극을 배웠다. 그는 귀국해 북극으로 눈을 돌려 예아(Gjoea)호로 1903/06년에 걸쳐 인류사상 처음으로 북서항로를 항해했다. 그러면서 그는 에스키모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이 극지에서 살아가는 지혜를 배웠다. 그는 난센의 프람(Fram)호로 표류하면서 북극점을 종단할 계획을 세웠으나 미국인 로버트 피어리(Robert Peary, 1856∼1920)가 1909년 4월 6일 북극점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고 남극점 도달로 계획을 바꾸었다. 아문센의 형이 탐험대를 조직하면서, 탐험대에는 아문센 보다 극지탐험 경력이 더 있는 사람이 있었지만, 아문센이 탐험대 대장이 되었다. 그는 탐험선 프람호로 오슬로를 1910년 6월 3일 떠나, 대서양 마데이라 군도에서 남극을 탐험한다는 것을 대원들에게 알렸고 영국 로버트 스콧(Robert Scott, 1868∼1912)에게도 전보로 통보했다. 한편, 스콧팀은 1910년 6월 15일 테라 노바(Terra Nova) 호로 영국 카디프를 떠났다.
로알드 아문센이 이끈 노르웨이 탐험대가 1911년 1월 14일 남극대륙의 훼일스만에 도착, 개썰매를 타고 남극점 탐험에 나서고 있다. 아문센이 타고 간 프람호는 당대 최첨단의 극지탐험선이었다.
아문센은 1911년 1월 14일 로스 빙붕에서 동쪽인 훼일스만(Bay of Whales)에 도착했으며 그 곳을 프람하임(Framheim)이라고 불렀다. 그는 남극점까지 잇는 직선상 남위 80°, 81°, 82°에 사람과 개의 먹을거리와 연료를 비축했다. 그는 1911년 9월 8일 네 사람과 함께 남극점으로 출발했으나 기온이 대단히 낮아 동상에 걸리고 개가 얼어 죽어 며칠 후 기지로 되돌아왔다. 그러면서 아문센이 너무 빨리 달려 그보다 극지 경험이 더 있는 대원을 포함한 두 사람이 아주 늦게 기지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아문센이 그에게 늦은 이유를 묻자, 그가 아문센을 공격했고 아문센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문센은 그를 용서하지 않아, 필요한 말 외에는 그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탐험대를 두 팀으로 나누어 자기를 공격했던 대원을 포함해 1차 탐험에 나섰던 사람들은 ‘킹 에드워드 7세 지역’을 탐험하게 했다. 그는 남극점 탐험에 실패하더라도 그 지역을 탐험했다는 명예를 얻으려 함이라고 탐험대를 나눈 이유를 설명했다.
아문센은 1911년 10월 20일 4명과 함께, 개 52마리가 끄는 썰매 4대에 나누어 타고 기지를 떠났다. 그는 개들이 지치지 않을 정도로 하루에 24km를 전진했으며 11월 4일 마지막 물자비축소에 왔다. 그는 이후 가지고 가는 짐을 줄이려고 1°마다 물자를 비축하기로 결정했으며 돌아오는 길에 찾기 쉽도록 눈덩어리를 탑처럼 쌓았다. 또 짐이 줄어들자 약한 개를 죽여 강한 개의 먹이로 먹였다.
아문센은 남극종단산맥을 만나 악셀 하이베르그라고 이름을 붙인 빙하를 11월 17일 오르기 시작해 나흘 만에 지나 빙하 꼭대기에 올라섰다. 고원 위에서 개 18마리를 뺀 24마리를 죽여, 그 고기를 사람과 개가 먹었고 썰매도 한 대를 남겨두었다. 그들은 열흘 동안 눈보라와 짙은 안개와 싸우면서 남극대륙 고원 위로 올라와 크레바스가 발달한 마지막 장애인 ‘악마댄스홀’을 만났다. 마지막 장애를 지나 12월 8일 어니스트 섀클턴(Ernest Shackleton, 1874-1922)과 동료 두 사람이 1909년 1월 9일 도달했던 남위 88°23′을 돌파했다. 마침내 아문센과 네 사람은 1911년 12월 14일 금요일 오후 3시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했다. 남극점은 새로 내린 눈으로 덮였고 아문센의 사진기는 고장이 나, 다른 사람이 가져간 싼 사진기로 남극점 도달 증명사진을 찍었다. 아문센은 북극점에 세운 텐트 폴하임(Polheim)에 사흘을 묵다가 17일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노르웨이 기가 날리는 텐트에 노르웨이 왕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겨놓고 스콧에게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는 그 편지에 그 곳의 높이가 6,700m라는 실수를 했다. 남극점의 실제높이는 2,835m이다(아문센은 왜 6,700m라고 적었을까?). 남극점에 도착한 스콧은, 아문센이 혹시 기지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해,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그 편지를 가지고 온다.
1911년 12월 14일 남극점에 도달한 아문센과 대원들. 그들은 남극점의 정확한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천측을 하면서 사흘을 보냈다.
아문센팀은 하루에 24km를 가, 12월 31일경에는 100km 정도 떨어져, 스콧과 거의 같은 위도를 지나갔다. 그는 악셀 하이베르그 빙하를 잘 지나가 1912년 1월 26일 오전 4시에 기지에 와, 자고 있는 대원들을 깨워 커피를 찾았다. 그들은 1월 30일 프람호에 올라와 타스마니아 호바트에는 3월 7일 도착했다. 그리스 사람들이 ‘남쪽에 있는 미지의 대륙(Terra Australis Incognita)’이라고 부른 지 2,400년 만에, 1819년 남극이 발견된 지 92년 만에, 1895년 7월 제6차 세계지리학총회가 남극을 탐험 목표로 잡은 지 16년 만에, 마침내 인류는 남극점을 밟았다. 그 후, 아문센이 스콧보다 남극점에 먼저 도착했고, 1912년 1월 17일 남극점에 온 스콧 팀 다섯 사람은 돌아오다가 모두가 조난당한 사실이 문명세계에 알려지면서 영국신문은 아문센이 남극점으로 계획을 바꾼 것을 엄청나게 공격했다. 그러나 아문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시 세계최강이었던 영국은 1905년 독립한 노르웨이가 남극점에 먼저 도착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문센은 남위 80, 81, 82도에 극지탐험용 식량을 비축해뒀다. 이런 작업은 남극점 탐험시 생사가 걸린 꼭 필요한 조치였다.
아문센은 1918∼20년 모드(Maud)호로 북동항로를 개척했으며 이후 비행기로 북극점을 종단하려던 계획은 실패했다. 그는 1925년에는 비행기로 북극을 탐험하다가 간신히 돌아왔다. 아문센과 15명은 1926년 5월 11일 비행선 노르즈(Norge)호로 스피츠베르겐을 이륙해 이틀 뒤 알라스카에 착륙했으며 북극점 상공에 도착했다고 주장했다. 일생 결혼을 하지 않았던 그는 조난당한 비행선 이탈리아(Italia)호의 움베르토 노빌레(Umberto Nobile, 1885∼1978)일행을 구조하려고 1928년 6월 18일 나갔다가 조난당했다. 노빌레는 살아 돌아왔으나 아문센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남극은 고래잡이 터가 되다가 1957/58년 국제지구물리년(IGY)에 다시 한 번 국제사회의 관심이 되었다. 그 기간에 12개국이 40개가 넘는 기지를 남극대륙과 남극반도에 지었으며 20개를 섬과 아남극에 짓고 대륙의 빙상과 기상과 지자기와 고층대기와 남빙양의 해양을 주로 관찰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지리남극점에 아문센-스콧 기지를 짓고 당시 소련은 지자기남극점에 보스토크기지를 지었으며 도달불능극을 탐험했다. 도달불능극이란 남극대륙의 해안에서 가장 멀어 가장 가기 힘든 곳을 말하며 위치는 남위 82°08′, 동경 54°58′이며 높이 3,718m에 얼음두께는 2,980m이다.
아문센(맨 우측)과 그의 대원들. 총 5명으로 꾸려진 탐험대는 개52마리와 함께 남극을 향해 출발, 57일재 되는 날 남극점에 도달했다. 이때 개들의 희생이 큰 역할을 했는데, 대원들과 다른 개의 먹이로 사용되고 12마리만 돌아올 수 있었다.
[출처 : 한국극지연구진흥회,극지진출사,극지탐험가]